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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문화사업단 단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7월에 흥사단 나라사랑 국토순례 단을 이끌고 태백에서 안동까지 5박6일 행진중에 마지막 도착지인 안동에 도착하여 민속박물관 관람을 하던중 서예하시는 청남 권영한 선생께서 글을 쓰고 계시는데 가훈을 써주시곤 한다. 그래서 본관을 경주 최라고 하니 아래의 글을 써주신다.
" 人百己千 "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의 노력을 한다. 문창후 선생께서 당나라에 유학시절 마음에 항상 " 인백기천 "을 새기면서 다짐을 하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유학 6년만에 과거급제를 하신다.
최고운선생 영정 (0) | 2011.0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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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초에 선친 산소에 갔다 오고 오늘 갔다온다. 선친 위에 있는 산소 주인이 관리를 하지 않아 심어놓은 관상용 나무가 선친 묘를 덮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톱을 준비해 가지를 치기로 작성하고 나섰던 것이다. 10월17일은 선친 제사다. 추석 때 성묘를 안동으로 내려가 윗대(9대조 까지) 성묘를 하는 바람에 선친 산소에 성묘를 못하고 있다가 제사 전에 성묘를 하는 것이 좋을 거 같아 오늘 나섰던 것이다.국제공원이 생긴지도 벌서 40년이 가깝다. 이제는 더 쓸 만한 곳은 없고 파묘를 해서 이장이나 화장을 해서 그런지 파묘들이 군데 군데 보이기도 한다. 오래 되다 보니 후손들이 관리를 하지 못해 잡초가 우거진 묘들이 보인다. 관리비를 내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다. 국제공원(고봉동주민센터)으로 가는 버스가 화정역에서 038번이 있다는 것을 성묘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알았다. 그래서 화정역 까지 타고 온다. 화정역에서 마을 버스로 환승했지만, 집을 나설 때 85-1번을 타고 관산교에서 내려 55번으로 환승해서 갔다. 고봉동주민센터를 경유하는 버스노선이 많이 늘었다. 050(일산구청-필리핀참전비). 036(지영동-관산동). 038(고봉주민센터-화정역 배차시간40분). 55.(대화역-불광역) 55-1.(일산-구파발역) 55-2.(일산-구파발역) 55-3(대화역-구파발역) 배차시간은 최소 15분에서 40분 차가 난다. 그래도 10여분 기다리면 어느 버스가 오던지 온다.
10월1일은 종조부님 제사가 있어서 상계동 작은숙부님댁에 간다. 추석성묘 때 올릴 밤을 친다 150여개. 음력 8월13일에 제사를 모시는 종조부님은 6.25 때 돌아가신 분이다. 돌아가신 내력은 피난 때 마을 동태를 살피려고 마을로 들어와서 보니 괴뢰군들이 철수를 한 터라 마을은 비워저 있고 괴뢰군들이 남기고 간 옷을 아무 생각없이 걸첬다고 하신다. 그런데 아군들이 착각을 하고 난사를 해서 사망했다고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들려주신 얘기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제사를 모시지 못하다가 10여년전에 안평 치실에 사시는 큰고모님께서 작은집에서 제사를 모시라고 해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이날 작은숙부님댁에 와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추석 성묘하려 안동으로 내려간다. 2일 점심을 먹고 중화동 큰숙부님과 함께 안동으로 출발했는데 복잡할거 같던 고속도로는 한가하다. 안동까지 휴게소에서 쉬면서 4시간30분만에 도착했다. 선친의 외사촌 댁(내게는 진외가 5촌 당숙)에서 하루밤을 잔다. 찜질방에서 자고 추석 당일 아침에 움직이곤 했는데 이날은 진외가 당숙댁에서 잔다. 추석당일 6시경에 의성군 단촌(7촌아제) 재백부님에 들러 아침을 먹고 장림 (검상골)으로 들어간다 검상골에는 두분의 재당숙 댁이 있다. 성묘는 검상골에서 부터 시작한다. 먼저 고조모 광산김씨 할머니 산소에 성묘를 하고 재증조부모님(고조부모님 셋째)의 산소 1일 제사를 지낸 종조부님 그리고 증조모 의성김씨 할머니 재증조부님(고조부모님 넷째) 그리고 할머니 종조부모님 등 총13군데 성묘를 다닌다. 숙부님 두분은 고추(일초)를 따신다. 매년 재당숙(실건아제)께서 일거놓은 고추밭에서 딴다. 일차적으로 검상골에서 성묘를 하고 재당숙(동춘아제) 댁에서 점심을 먹고 재당숙(실건아제) 댁에서 커피 한잔하고 안동 일직 조탑으로 이동한다. 이곳은 400년전에 남양주 진건에서 안동 일직 조탑으로 이주 역사를 가지고 있다.14대조(관자 세자)산소는 남양주 진건 용정리 선영에 있다 한다.13대조(성자 원자) 까지 산소가 있는 곳이다. 우리는 9대조 까지만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면된다. 그 윗대는 몇년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한다. 근 4년에 한번 돌아온다. 현조부모(태자 주자) 산소는 쌍분으로 되어 있다. 항상 여기서 모여 벌초와 성묘를 하고 4개조로 나뉘어서 벌초와 성묘를 한다.오늘은 우리가 좀 늦었다. 현조부모님 산소에 도착하니 벌초를 다해놓은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성묘를 하고 조를 편성한다. 갓제이(9대조 중자 선자 할매,8대조 응자 걸자 할배 할매, 7대조 구자 진자 할배, 조부 종자 덕자) 산소는 작은숙부님과 제영아제,철용이,병철이,병혁,병진이 그리고 나. 진능제(고조부 영자 진자와 증조부 만자 기자)는 실건아제 진태아제 병길,병연 이슴골(7대조 조모)과 공동묘지(증조모 해주 오씨)는 청목아제 동춘아제 제덕아제 음지 6대조 도자 영자 할배 할매 산소는 진노아제,병찬,병관 이렇게 조를 편성한다. 충목아제와 큰숙부님은 조산정에 남는다. 벌초를 하는 중에 작은 숙부님 왼쪽 중지 손가락을 낫에 베이신다. 내려오다 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받는 졸음 운전으로 깜짝 놀랜적 있는데 결국 피를 보신다. 많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성묘를 마치고 조산정에 다 모여 아제들과 산소 이장 문제를 논의 하는데 반반으로 갈린다. 한쪽에서는 동생들이 종친회 모임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다. 나도 참석해야 하나 아제들과 회의를 해야되기에 동생들회의에는 참석치 못한다. 이장할때 진묘로 하느냐 가묘로 하느냐에 결정을 내지 못하고 더 연구하자고 결론낸다.300년이나 되는 산소를 옮긴다는게 쉬운게 아닌것은 분명하다. 좀더 이것 저것 알아보고 좋은 쪽으로 결정 내리자는 의견으로 일년 더 숙고하자고.. 8촌 종반간이 모여 벌초하고 성묘하고 나면 헤어지기가 바쁘다. 같이 성묘후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종반간의 대화도 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야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올해는 형제들이 모임을 제대로 만들어 일년에 두번 정도 형제 가족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해보자고 하니 잘되지 않을까 생각든다.
단촌 재백부님댁에서 작은숙부님
큰숙부님
고조모 광산김씨 산소 앞에 철용 뒤가 성욱
앞이 실건아제,동춘아제,청목아제,진노아제
철훈과 아이들
흥자 기자 재종조부 산소
증조모 의성김씨 산소
조모 안동김씨 산소
고추밭 아래 증조모 조모 재종조부와 종조부 산소가 있다.
앞에 충목 재백부 등지신분은 작은숙부 가운데가 병혁 동생, 우측에 제덕 재당숙
현조 태자 주자 쌍분 묘
할아버지 산소에서 내가 태어난 새용각 마을이 보인다. 8년을 살은 곳
할아버지 산소
9대조 할머니 산소
8대조 응자 걸자 쌍분 묘
慶州 崔氏 觀稼亭 公 諱 淸 波(일직)
1世 崔 致遠(문창후) 후손11세 淸청(관가정) 후손16세 觀世관세할아버지 이후 경기도 양주에서 안동 일직 조탑으로 이주하여 근500년을 이곳에서 정착한다. 후손 21세 重籼중선 23세 邱鎭구진 후손으로 30세 秉圭(병규) 系譜
1世 - 崔 致遠(치원)(羅州羅氏라주라씨)
2世 - 殷含(은함-1남) - 允順(윤순-2남)
3세 - 承老(승로)
4세 - 肅(숙-1남) - 義(의-2남)
5세 - 濟顔(제안-1남) - 周(주-2남)
6세 - 繼勳(계훈-1남) - 文勳(문훈-2남) - 尙勳(상훈-3남)
7세 - 玄培(현배-1남) - 玄祐(현우-2남) - 玄進(현진-3남)
8세 - 隰(습)
9세 - 有慶(유경)
10세- 子雲(자운-1남)(豊壤趙氏풍양조씨) -峀雲(수운-2남)-海雲(해운-3남)
11세- 淸(청-1남) 觀稼亭公 諱 淸 波(관가정공 휘 청 파)
(貞夫人慶州李氏정부인경주이씨) -江(강-2남)
12세- 淵止(연지-1남)(淑夫人密陽朴氏숙부인밀양박씨)
-信止(신지-2남)-儉止(검지-3남)-漢止(한지-4남)
13세- 敬忠(경충-2남)(淑夫人咸陽朴氏숙부인함양박씨)
-敬仝(경동-1남)-敬忠(경충-2남)-敬誠(경성-3남)-敬義(경의-4남)
14세- 光門(광문-1남)(貞夫人原州元氏정부인원주원씨)
- 崇門(숭문-2남)-潤門(윤문-3남)-興門(흥문-4남)
15세- 潾(린-1남)(貞夫人開城王氏정부인개성왕씨.
貞夫人慶州李씨정부인경주이씨)
-挺(정-2남)-漣(련-3남_-浚(준-4남)-漳(장-5남)-瀋(심-6남)
16세- 觀世(관세-5남 : 3남이라 하는데 5남으로 되어 있음)
(淑夫人慶州李氏숙부인경주이씨)
-安世(안세-1남)-允世(윤세-2남)-範世(범세-3남)-龍世(용세-4남)
-觀世(관세-5남)-永世(영세-6남)-寬世(관세-7남)
17세- 聖元(성원)(安東權氏안동권씨)
18세- 夢道(몽도)(密陽朴氏밀양박씨)
19세- 犀翊(서익)(安東權氏안동권씨)
20세- 商準(상준-1남)(安東金氏안동김씨) - 商墩(상돈-2남)
21세- 重籼(중선-4남)(貞夫人金海金氏정부인김해김씨)
- 重糈(중서-1남) - 重粕(중박-2남) - 重樑(중량-3남) - 重籼(중선-4남)
22세- 應傑(응걸-1남)(聞韶金氏문소김씨)
-應彦(응언-2남) -應瑩(응영-3남)
23세- 邱鎭(구진-3남)(淑夫人義城金氏숙부인의성김씨)
-邦鎭(방진-1남)) -卿鎭(경진-2남) -邱鎭(구진-3남)
24세- 渡暎(도영)(星山李氏성산이씨)
25세- 泰柱(태주-1남)(金海金氏김해김씨) - 厚柱(후주-2남)
26세- 榮進(영진)(光山金氏광산김씨) 4형제를 두신다.
-晩基(만기-1남) -農基(농기-2남) -興基(흥기-3남) -善基(선기-4남)
27세- 晩基(만기)(義城金氏의성김씨)(海州吳氏해주오씨)
28세- 鍾德(종덕)(慶州李氏경주이씨)(安東金氏안동김씨)
29세- 南濟(남제.大芳대방) - 30세- 秉圭(병규)
29세- 昌濟(창제) - 30세- 秉俊(병준)
29세- 泂濟(형제) - 30세- 秉河(병하)
28세- 鍾純(종순)-절손
28세- 鍾成(종성)
29세- 遠濟(원제) - 30세- 秉浩(병호)
秉碩(병석)
27세- 農基(농기)(慶州金氏경주김씨)(震)
28세- 鍾點(종점)
29세- 濟睦(제목) - 30세- 秉官(병관)
29세- 濟春(제춘)
29세- 濟慶(제경)
27세- 興基(흥기)(延日鄭氏연일정씨)
28세- 鍾振(종진)
29세- 濟淑(제숙)
29세- 濟煥(제환) - 30세- 秉庸(병용)
秉哲(병철)
秉旭(병욱)
29세- 濟溢(제일) - 30세- 秉勳(병훈)-31세
28세- 鍾健(종건)
29세- 濟洪(제홍) - 30세- 秉潤(병윤)-31세-承然(승연)
成然(성연)
秉赫(병혁)-31세
29세- 濟得(제득) - 30세- 秉辰(병진)
29세- 濟雄(제웅) - 30세- 秉旭(병욱)
秉律(병률))성률)
29세- 濟英(제영) - 30세- 秉臣(병신)(성신)
秉星(병성)
28세- 鍾出(종출)
29세- 濟源(제원) - 30세- 秉重(병중)
秉轍(병철)
28세- 鍾石(종석)
29세- 濟甲(제갑) - 30세- 秉燦(병찬)
濟乙(제을) - 30세- 秉萬(병만)
27세- 善基(선기)(海州吳氏해주오씨)
28세- 鍾祿(종록)
29세-濟丙(제병) - 30세 -秉吉(병길)
秉年(병년)
29세-濟瓚(제찬) - 30세-
29세-濟東(제동) - 3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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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씨의 유래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사로(斯盧)의 6촌(村) 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사량부)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遠祖)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누대로 살아온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명문거족(名門巨足)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857년(신라 헌안왕1) 신라의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했던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0년안에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 때 혼자 당(唐)나라에 건너가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금방(金榜:장원)하여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治績)을 쌓아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받았다.
879년(헌강왕5) 당나라 반적인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했던 고운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노라...] 반적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으리만큼 가슴을 꿰뚫는 세찬 힘을 지닌 글로서 천하를감탄시킨 명문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중산복궤집]과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名著)를 저술했으며, 884년(헌강왕10)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僖宗)의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태산(太山:태인), 함양(咸陽), 부성(富城: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 894년(진성여왕 8년)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嘯風弄月)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2)에 95세로 선화(仙化)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孤雲)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신라인)으로서 당나라 명사(名士)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고운(顧雲)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詩)가 고운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던 활약상을 뒷받침해 준다.
[내가 들으니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어 그들은 머리에 높은 산을 이고 있고, 산 위에는 황금의 궁궐, 산 아래에는 한없는 바다로되 그 중 푸른 계림이 있어 거기 특이한 인물이 태어나니 그는 3세에 바다를 건너 문장으로 중원을 감동케한 이로서, 18세에 문단에서 마음껏 겨루며 단 한번의 화살로 금문책(金門策:과거)을 맞추었노라]
이 한편의 시를 통해서 중원을 주름잡던 고운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그가 남긴 심오한 문장은 깊은 함축 속에 많은 뜻을 간직하여 우리 한문학의 조종(朝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전기의 문장가로 알려졌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계원필경을 봄에, 아직도 알지 못할 이 있으니당시의 기풍이 이처럼 놀라웠음은 아직도 이땅의 문장이 일찍이 예와 같이 않음이로다]라고 했으며, 성종(成宗) 때의 대문호였던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으로부터 비롯된다(我國文章始發於崔致遠)]고 쓰고 있다.
또 효종(孝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최치원의 시는 격률이 엄격하고...표현에 뜻이 깊은 함축이 있어 직접적 표현 대신 끊이지 않는 여운이 있다]라고 평했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豫示)를 왕건(王建)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 건국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조선 때 와선 인조(仁祖) 명종(明宗) 선조(宣祖) 임금이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참조 -명종 1545(병오)-1567(정묘) - 선조 1568(무진)-1608(무신) - 인조 1623(계해)-1649(기축) - 정종 1399(기묘)-1400(경진)--
한편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太祖:왕건)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老:시조 고운의 손자, 원보 은함의 아들)는 나이 겨우 12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分)을 하사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사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후 승로의 나이 17세 때 고려 태조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 이후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積弊),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偶像)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개국공신 후손의 등용 등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간추린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7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했던 관가정(觀稼亭) 청(淸)은 자운(子雲)의 아들로 고려말에 겸교정승을 지냈으며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上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洲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태종14)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인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후손 몽량(夢亮)은 병마정도사를 역임한 인(隣)의 증손이고 확(確)의 아들로1617년(광해군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의주판관(義州判官)이 되어 1627년(인조5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독전(督戰)중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다가 살해 되었다.
문창후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치적으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화숙공 현우의 6세손 형손(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종질 호(湖)는 무과에 장원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어 가문에 공신(功臣)의 맥(脈)을 이었다.
화숙공 현우의 8세손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했던 숙생(淑生)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고 인조(仁祖) 때의 명장 진립(震立)은 경주최씨의 [쌍의(雙義)]로 가문에 절맥(節脈)을 이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안(齊顔)의 증손이며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렬공(忠烈公) 광위(光位:제안의 현손)는 고려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받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랑공(正郞公) 호(灝)는 고려 정종 때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의 명저를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사성공(司成公) 예(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충간(忠諫)으로 유명했던 문밀공(文密公) 제(堤:밀직공 선지의 5세손,문숙공 선의 아우)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9살에 시를 지었던 문정공(文正公) 해(瀣)는 원(元)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지내고 귀국한 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벼슬에 있는 동안 기복이 많았으나 조금도 지절을 굽히지 않았고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 [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당대의 문호로 명망을 떨쳤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했던 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늙었다는 이유로 근왕(勤王)하는 장수를 바꾸려하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종하는 후미부대를 지휘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당하자 이 노장(老將)은 용인 험천(龍仁險川)에서 순절했는데,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며, 화살이 다 되자 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라]하고는 끝까지 항전했다. 난이 평정된 후에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그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을 온 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있는 것 같이 자약했다고 한다.
한쪽 눈에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일생을 기인(奇人)으로 살았던 호생관(毫生館) 북(北)은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리웠으며, 팔도를 주유(周遊)하다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에서죽는 것이 마땅하다]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외 정조(正祖) 때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일컬어졌던 흥원(興源)과 시집(詩集)을 남겼던 소(昭)를 비롯한 그의 손자 성효(性孝)가 뛰어났으며,
동학교조 수운(水雲) 제우(濟愚)는 경주 귀미산(龜尾山) 용담(龍潭)에서 득도하여 동학(東學)을 창설했고, 토대로 하여 이 세상은 공맹(孔孟)의 덕(德)으로는 부족언(不足言)이라 하고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제병장생(濟病長生)을 주장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표현했으며, 종수(宗秀)의 아들 시형(時亨)은동학의 제 2대 교주로서 이름났었다.
한말(韓末)에 경향(京鄕)의 선비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던 대원군(大院君)의 정책을 탄핵하고 일생을 대절(大節)로 살다간 면암(勉庵) 익현(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운동을 지도했고 항일구국 항쟁의최선봉에 나섰던 한말 최대의 거유(巨儒)였다. 1855년(철종6) 문과에 급제했던 면암은 고종(高宗) 때 장령(掌令)을 거쳐 호조 및 공조판서(戶曹,工曹判書)와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내고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우리민족이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는 오직 궐기와 투쟁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여 전국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국가 패망의 때를 당하여 여러 동지와 더불어 죽기를 결심하고 의기를 높이 들어서 싸우고자 한다]는 거의소(擧義疏)를 채택했다.
[백발이 휘날리어 밭이랑에 드날림은/초야의 충심을 바치려 함이로다. /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할 일/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오] 당시에 면암이 지은 시로서 구절마다 애국 충성의 염이 가득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일제는 끝내 굽힐 줄 모르는 면암의 충절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마도(對馬島) 위립영(衛立營)으로 귀양보내어 단발을 강요했으나 그는 단식으로 대항하며 제자 임병찬(林炳贊)에게 유소(遺疏)를 구수(口授)하였는데, 왕으로 하여금 오직 영구히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을 예언했고 자기는 한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이 모두 적의 공급에 의한 것이므로 단식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나이 74세이니 죽는 것이 조금도 애석하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내용이 [면암집(勉庵集)]에 전한다.
1906년(광무10) 10월 수비대장으로부터 면암에 대한 식비가 한국 정부의 부담이라는 말을 듣고 계속하던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단식으로 병을 얻어 그해 2월 5일에 대마도 병영에서 서거하니 그의 한 많은 일생과 신념으로 일관되었던 생애가 종결되었다. 면암의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의 자질문인(子姪門人)은 물론 상무사원(商務社員)을 비롯한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부두에 나와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란 조기를 높이 들고 통곡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일본의 과중한 과세에 항거했던 봉환(鳳煥)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우리나라한글 발전에 공헌했던 외솔 현배(鉉培), 독립운동가인 창식(昌植) 등이 학문과 충절(忠節)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경주최씨를 더욱 빛냈다
경주최씨의 여러파의 파조
1) 관가정공파(파조:淸) 청 11세) 광정공파(파조:鄲) 단 12세) 게림군파(파조:倬) 탁 8세) 길성군파(파조:有井) 유정 10세) 동성공파(파조:宗瑜) 종유 7세) 문밀공파(파조:提) 제 9세) 문순공파(파조:문순공 渙 환 6세) 문정공파(파조:瀣) 해 12세) 밀직공파(파조:光祐 광우 9세) 사성공파(파조:汭) 예 12세) 상서공파(파조:淵) 연 11세) 송오공파(파조:漢) 한 12세) 시중공파(파조:尙勳 상훈 6세) 영흥공파(파조:영흥백에 봉한 之美) 지미 8세) 좌윤공파(파조:海雲)해운 10세) 정랑공파(파조:灝) 호 12세) 진사공파(파조;宗祗) 종지 4세) 청성군파(파조:淸城侯 周) 청성후 주 5세) 충렬공파(파조:光位)광위 9세) 판서공파(파조:江)강 11세) 판서공파(파조:士元)사원 8세).판서공파(파조:賢進)현진 12세) 화숙공공파(파조 玄祐 현우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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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의 유래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인 최씨는 역사상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거족으로 오랜 역사의 흐름과 체험 속에서 많은 특성을 남겼으며, 역사상 선현들이 이룩해 놓은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최씨 특유의 기재·강기신념·절조등으로「최고집」 혹은 최씨 앉은 자리 풀도 안난다.」등 많은 애칭을 낳기도 하였다.
모든 최씨의 원조는 신라건국의 모체가 된 사로국(斯盧國)(서라벌) 사량부(沙梁部)의 돌산(突山)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신라건국설화에는 소벌도리가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다고 전하며 다음같은 기록이 보인다. 기원전 44년 어느날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양산 나정(蘿井) 옆을 지나다가 말 울음소리를 듣고 숲속으로 달려가보니 말은 달아나 보이지 않고 큰 알만 놓여 있었다.이상히 여긴 소벌공(蘇伐公)이 그 알을 깨어 보니 그 속에 아이가 들어 있는지라 집으로 데려와 길렀다. 나이10세가 되자 기골이 장대하고 숙성하여 비범한 재질을 보이므로 소벌도리(蘇伐都利)가 특별히 교육시켰다.
전한(前漢) 효선제 오봉 원년 4월(기원전57년)에 진한(辰韓) 6部(6촌)에서 공동추대하여 임금으로 즉위시키니 나이는 13세요 명칭은 거서간, 국호는 서라벌이었다.당시 태어난 알이 박만 했다 하여 성(姓)을 박(朴)으로 삼으니 이가 바로 신라의 시조왕 박혁거세였다.혁거세(赫居世)는 즉위 후 자신을 추대한 공로에 따라 육부촌장에게 성씨를 하사했는데, 알천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씨, 돌산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는 최씨, 무산대수촌장 구례마에게는 손씨, 취산지지촌장 지백호에게는 정씨,금산가리촌장 기타에게는 배씨, 명활산고야촌장 호진에게는 설씨의 성을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위의 6부 촌장들이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최(崔)자의 뜻》崔는 높을 山과 사람 人,흙 土를 두 개 포갠 圭자로 형성된 문자이며 이 규(圭)자는 천자에게 받은 땅을 다스린다는 뜻과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내리던 신표의 뜻으로 위로는 뫼 山,아래로는 사람 人, 흙 土를 두 개 합친 최(崔)자는 하늘아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인신 최고의 신분표시였다. 삼국사기에 유리왕 9년(32)에 6촌의 이름을 6部로 고치고 17관등을 설치한 것을 두고 일부에선이때를 6촌장 득성(得姓)시기로 보지만 이것은 종래 사로(斯盧) 6촌을 행정구역인 6部로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신라의 중앙관제가 공식적으로 만들어 지고 지방제도가 지역적인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는 시기로서 이미 박혁거세 즉위 초에 사성받았던 6부촌장들의 성(姓)은 변함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또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정씨(鄭氏)의 조상도 되며 진주 소씨(蘇氏) 시조도 소벌도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세계(世系)를 구체적으로 밝힐 만한 문헌은 없고 다만 다음같은 두 가지 說이 있다. 최(崔)씨의 원류》요(堯)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현재 길림성)의 하백에 봉해 졌으며 기원전 2266년경 소성(蘇城)이 단군조선에 영속됨에 따라 기씨에서 소씨(蘇氏)로 성을 고쳤으며 이 소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이며, 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이 진주 소씨 중시조인 소경(蘇慶)이라고 하는 說과, 풍이(風夷)의 후손인 적제축융(赤帝祝融)이 기원전 4241년 풍주(風州)의 배곡(倍谷)에 도읍을 정하고 전 국토에 부소나무(蘇:무궁화)를 심어 소(蘇)를 姓으로 삼고 이름을 소복해(蘇復解)라 하였고 그후 소복해의 61세손 소풍(蘇豊)이 기원전 2392년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졌으며 소풍(蘇豊)의 69세손 소백손(蘇伯孫)은 신유(申有) 진기(陳岐)등과 함께 진한(辰韓)을 세웠다는 說이 있는데, 이 소백손의 29세손 소경(蘇慶)은 신라 진지왕 2년(577)에 출생하여 처음 이름을 알천이라 하였고 진덕왕 때(702~737) 상대등 벼슬을 지냈다.
일찍이 소경(蘇慶)은 후손이 없어 걱정하였는데 어느날 꿈에 나타난 소벌도리의 계시(진주 도사곡으로 이사하면 9저를 얻을 것이라 함)에따라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 3월에 지금의 진주 상대동으로 이거하고 이름을 경(慶)으로 개명하였다 한다.이후 과연 9대에 걸쳐 9명의장군이 배출되었고 후에 후손들이 소벌도리를 원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삼아 소경(蘇慶)을 중시조로 모셨으며 이로서 진주 소씨의 문호가 열렸다.중시조 소경(蘇慶)은 관직이 각우에 이르렀고 나라에 큰공을 세웠으며 태종무열왕 3년(656)에는 왕이 그의 조상인 소벌도리를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국사(國史)에 의하면 기원전 200년을 전후하여 삼한(三韓:마한.변한.진한)에는 국읍(國邑)옆에 천군(天君)이 제사를 받드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이 있었다.이 소도(蘇塗)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다 방울과 북을 걸어 신성지역임을 표시하였고 천군(天君)이 제사장으로 농경예식과 종교의례를 주관하였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소백손(蘇伯孫)이 진한(辰韓)을 세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 조상들은 이미 천군의 직위를 갖고 별읍(蘇稻)에 머물면서 別邑의 명칭을 소(蘇)라 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진주 소씨의 경우 중시조 소경(蘇慶)이 소벌도리의 25세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위 두 설중 어느 說을 취하더라도, 기원전 2392년 소풍(蘇豊)이 소성(蘇城)의 하백에 봉해진 사실과 기원전 2266년 단군조선에 예속된 사실등은 일맥상통한다.또한 이 소풍(蘇豊)의 69세손은 진한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이며 그의 29세손이 소경(蘇慶)이고 소경은 소벌도리로부터 25세손이니 진한(辰韓)을 일으킨 소백손(蘇伯孫)의 증손자가 바로 최씨의 득성조 소벌도리(蘇伐都利)인 것이다.
소벌도리에 이르러 새로이 최성(崔姓)을 득성(得姓)하였으나 그 후손들 중 일부는 종래 천군의 지위로서 기존의 소씨(蘇氏)를 유지하였을것이고 점차 대 군장세력에게 그 직위가 예속되어 감에 따라 일부 후손들은 새로운 성씨(崔氏)로 개명,사용했던것으로 추측된다.이는 경주 최씨 시조 최치원(崔致遠)이 소벌도리의 24세손이라는 사실에서 그 흐름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시조는 소벌도리의 24세손이며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을 주축으로 하여 선대 및 후대에서 분파되었다고 보면 정확 하다. 「경주최씨상계세보」의 기록으로는 소벌도리 24세손 최치원의 윗대 에서 분파된 본관으로 개성·동주(철원)·전주(군옥파)가 있고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청주·영흥·충주·용강·수원·부안(扶安) ·강릉·강화·화순·통천·양천·원주·해주·진주·탐진·전주(순작, 균)가 분파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여 소벌도리와 최치원을 잇는 같은 후예임은 틀림이 없다고 본다.
이렇게 신라시대에 웅기한 최씨는 신라에서 최치원·최승우·최언위등 세 사람이 똑같이 당 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그 명성을 날림으로써 1대3최라 불리웠으며 특히 문창후 최치원과 같은 대 문장가는 우리 나라는 물론 동양의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 아보기 힘든 명현으로 그가 남긴 도학과 문장은 동양최고의 지성이 고 한문학의 조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고려 때 와서는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고려사를 보면 수많은 최씨들이 역사를 수놓았으며 서기 1196년 (명종 26)∼1258년(고종 45)까지 60여 년 간 군벌정치로 한때 최씨왕국을방불케 했다. 충절의 명장 최영은 수많은 국내외 침입과 반란이 있을 때마다 격퇴, 평정하여 고려의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에 공헌했으며,죽음에 임했어도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충절은 우리 민족의 얼이 요, 최씨의 특성이다. 그외 고려 때 문신 최유청·최윤의·최유엄·최재·최항·최충 등이 유명했으며 무신으로는 최충헌이 있다.
조선 때 와서 명신 최명길, 양명학의 대가 최석정, 학자 최수성, 문신 최응현·최항·최만리·최익현,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신문학 운동과 국학의 개척자 최남선, 항일투사 최재형, 동학의 제2교주 최시형 등 많은 최씨들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국가에 공헌했다. 한 씨족의 가문을 가늠하는데는 흔히 문과 급제자 수를 따지고 명문의 척도를 정치적 세력의 성장과 관련시키는 관료적인 조선사회에서 당시 과거제도가 권세가의 농락을 받은 일이 많아 견식과 인격을 겸비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최씨들에게는 벼슬이 그다지 증요시 되지 않았으므로신라와 고려에서 명성을 날린 최씨가 조선 때 와서 의외로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경주시 교동에 자리한 「최부자집」은 12대 만석과 10대 진사로 유명하여 문공부가 1969년에 「신라의 집」으로 선정하고 길이 보존하기로 했다. 마지막 만석군 최준은 이씨 조선 청백리 정무공 최진립의 11세손으 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100억원(현재기준)을 보내어 해방후 임시정부가 환국하자 백범 김구 선생께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어한 분이 최준이라고 하였으며, 이등박문을 제외한 역대 조선 총독들이 모두 경주 최준의 집을 방문하여 당시 문교부장(현 문교장관)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최준은 특히 폭넓은 교우 관계를 유지하면서 육영사업에 전 재산을 다 투자하였는데 그 예로 현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고동아일보 창간 발기인과 경성 방적 보성전문(현 고려대학)도서관 건립 등이 있다. 한 가정에서 400여년간 부를 누린 것은 자랑이 아닐수 없으며 지금도 국내외 인사들이 종종 경주 최부자 집을 방문하고 있다.
조선 때 명종·선조·인조임금은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대대로 군역에 동원하지 마라"고 전교 하였으며, 정종은 "태강(서원을 도퇴시킴. 즉 파면)의 예에 넣지 말고 범하는 수령은 처벌하라"고 전교 하였다. 이렇게 신라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가지 국난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최씨들이 등장하여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던 항일투사와 의병 및 근대사회 발전에 공헌한 많은 최씨들이 거룩한 발자취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명문인 최씨 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참조 --명종 1545(병오)-1567(정묘) - 선조 1568(무진)-1608(무신) - 인조 1623(계해)-1649(기축) - 정종 1399(기묘)-1400(경진)--
최치원(崔致遠)의 윗 대에서 개성,삭녕,동주(철원),전주(최군옥) 등으로 나눠지고 경주 최씨 2세조인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청주,충주,영흥,용강,수원,부안,강릉,강화,화순,통천,양천,원주 등으로 분관(分貫)이 되었으며 지손에서 해주,진주,탐진,전주(최 균)등으로 분관했다고는 하지만 정확히 고증된 바는 없다. 최씨는 경주 최씨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해주 최씨,우봉 최씨 등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전주 최씨와 동주 최씨도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최씨는 조선시대보다 신라와 고려에서 세력을 떨친 성씨이며 그 밖에도 김씨에서 최씨로 사성받은 수성 최씨와 중국에서 귀화한 충주 최씨가 있다.최씨는 문헌에는 326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는 125본만 전하며 이마저도 자세한 것은 수 십 본에 불과하다.최씨는 김,이,박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1985년 국세조사에서 191만 3322명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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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유래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대 씨족사회에는 성이라는 것이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이다.
1.고구려고구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다.그밖에 고구려에서는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주(周)· 마(馬)· 손(孫)· 창(倉)· 동(董)· 예(芮)· 연(淵)· 명림(明臨)· 을지 (乙支) 등 10여종 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백제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다.그밖에 사(沙)· 연(燕)· 협()· 해(解)· 진(眞)· 국(國)· 목 (木)· 백()의 8대성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고이(古爾)· 흑치(黑齒) 등 10여종의 성이 사용되었다.
3.신라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金)이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종성인 김씨·박씨는 7세기 초부터 《구당서》· 《신당서》에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이며, 국인에는 김·박 양성이 많고, 이성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한편, 6성(이·최·정·손·배·설)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밖에 장(張)·요(姚) 등의 성도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삼국의 성씨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삼국통일 후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 또는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글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이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와는 차이가 생겨났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신씨(申氏)·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4.고려시대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인 호족은 사성· 모성· 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을 분정(分定)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성씨록의 편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沈· 河· 玉· 明· 俊· 昔· 諸· 益· 森· 邦· 芳· 價· 勝· 濯· 承氏)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는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디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漢姓化)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5.조선시대고려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이 그만큼 많았다. 그렇게 많았던 천민층이 16세기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 성을 가지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성씨(姓氏)에 관한 옛 문헌(文獻)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들 수 있다. 이 문헌의 기록에는 우리나라 성씨의 총수가 무려 496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문헌이 편찬된 당시에도 이렇게 많은 성씨가 실재하였으리라고는 보기가 어렵고 고문헌상에 나오는 기록을 총망라한 성시의 기록으로 추산하여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말기 영조(英祖)때의 이의현(李宜顯)은 그이 저서 도곡장설(陶谷叢設)에서 우리나라의 성씨를 298성으로 수록하면서 이를 저성 희성 벽성 복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 성씨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통계는 1930년 10월 1일 실시한 국세조사의 상황이다. 이 조사는 국세조사의 부대조사써 실시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실시를 본관별로 세대주의 성을 조사한 것으로써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250성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왕족인 전주 이씨를 포함한 이성(李姓)이 항상 대성의 필두를 차지했으나 1930년 국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김성(金姓)이 월등하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1930년 10월 1일 국세조사에 따른 부대조사로 조사한 성씨와 분포상황에 따른 우리나라 10대 성을 살펴보면
김씨(金氏) 858,239, 이성(李姓)이 577,271, 박성(朴姓)이 304, 248, 최성(崔姓)이 190,237, 정성(鄭姓)이 147,475, 강성(姜姓)이 81,841, 장성(張姓)이 80,272, 한성(韓姓)이 77,224, 윤성(尹姓)이 74,292의 순으로 10대 성이 우리나라 총 가구수의 64.8%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3만가구 이상의 성시로는 오씨(吳姓), 임씨(林姓), 신씨(申姓), 안씨(安姓), 송씨(宋姓), 서씨(徐姓), 황씨(黃姓), 홍씨(洪姓), 전씨(全姓), 권씨(權姓), 유씨(柳姓), 고씨(高姓), 문씨(文姓), 백씨(白姓), 양씨(梁姓), 손씨(孫姓)의 순으로 16성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육대성을 이·김·최·안·정·박(李·金·崔·安·鄭·朴)의 순이라 하였으나 많이 변화한 것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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