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산(楚安山 115.4m)

초안산의 산 족보를 따져보면 백두대간 식개산분기점에서 한북정맥이 분기하여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한강봉 분기점에 이르러 한줄기는 오두산으로 이어지고(원 한북정맥 산줄기), 또 한줄기는 도봉산, 우이령을 거쳐 상장봉~월롱산~장명산으로 한북정맥 산줄기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한북정맥이 우이령(북한산과 도봉산의 경계) 가기 직전의 우이암분기점에서 남쪽으로 우이남능선을 거쳐 산불감시초소에 이르러 시루봉을 분가시키고 방학동, 쌍문동의 도심지역을 거쳐 도봉로를 지나 창동으로 들어선 후 생태육교(초안산교)을 건너면서 초안산으로 접어든다. 초안산 정상을 거쳐 월계로를 넘어 영축산을 일으킨 후 석계역 부근에서 우이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이 산줄기(단맥)의 동쪽으로 중랑천이 서쪽으로 우이천이 흐른다.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楚安山 朝鮮時代 墳墓群)

초안산은 서울 노원구 월계동 초안산 자락의 사적 제440호 조선시대 분묘군(墳墓群)이 그것이다. 이 분묘군은 1,154기의 묘가 있는데 정밀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가운데 1,000여 기가 환관이나 궁녀의 무덤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시네 산"이라고 한다. 특히 그 무덤들 가운데는 무연고 무덤이 많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 무연고 무덤에 오랫동안 위령제를 지내온 것이다. 

이곳 내시 묘들은 대부분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죽어서도 궁궐을 바라보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매년 가을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서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특히 이곳은 다양한 계층의 분묘와 수 백여 기의 석물(石物)들이 시기별로 분포되어 있어 조선시대 묘

 

 

 

 

 

 

 

 

 

 

 

 

 

 

 

 

 

 

 

 

 

 

 

 

 

 

 

 

 

 

 

 

 

 

 

 

 

 

 

 

 

 

 

 

 

 

 

 

월계동과 녹천동의 유래가 재미있다. 

·  월계라는 동명은 밤에 높은 곳에서 월계동 지역을 내려다 보니 맑은 시냇물에 달이 비치고 중량천과 우이천으로 둘러쌓인 모양이 마치 반달모양이므로 달월(月)에 시내계(溪)자를 붙여 월계동이라 하였다. 

 

이곳의 지형이 반달처럼 생긴데다 중랑천과 우이천이 이곳을 지나기 때문에 월계동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월계동은 조선 초까지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과 해등촌면 지역에 해당되었으나 갑오개혁 때 전국의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월계리,녹천리(鹿鹿理),역촌,능리(陵理)와 해등촌면 창동리가 이에 속하였다. 1914년 4월1일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고 연촌,능리,월계리,녹천, 창동 일부를 합쳐 월계리로 하여 관할하였으며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로 편입하면서 성북구에 속하였고 별도로 마련된 노해출장소의 관할구역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도봉구가 신설되자 이의 관할이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신설되자 노원구 월계동이 되었다. 물고기 모양의 지형으로 된 월계동은 동쪽으로 중랑천이 흐르고 동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북한산의 지맥이 이어지는데 몇 개의 마을이 모여 월계동을 형성하였다. 갑여개혁 때까지는 대개 이 자연부락들이 하나의 마을형태를 이루었는데 1914년 이후 행정단위의 최소단위인 동리(洞理)로 규정되었다. 월계동을 이루는 자연부락은 녹천(鹿川),연촌(硯村),각심절, 능골(陵里),창골(倉洞)인데 이 가운데 창골의 일부는 창동으로, 나머지는 월계동으로 편입되었다.

월계동의 중심이 되는 녹촌은 녹천(鹿川)이라고도 한다. 북한산 지맥으로 이어진 크고 작은 산맥이 월계동 근방에 오면 높이 100m 내외의 야산으로 변하는데 그 사이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이 계곡들은 서쪽으로 우이천이나 동쪽의 중랑천으로 유입되는데 대개의 하천 지류들은 여러 가닥이 모여 하나의 본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곳의 하천은 두가닥으로 시작해서 767번지 근방에서 하나로 합쳐진다. 이 모습이 마치 사슴머리에 난 뿔 같다 하여 녹촌이라 불렀다. 조선 중기때 중랑천이 범람해서 우이천까지 물이 흘러들어 가는 큰 홍수로 인해 지금의월계로 근방 마을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뒷산으로 이주하여 인명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가재도구와 넓은 논밭이 온통 황토흙으로 뒤엎여 살길이 막막해졌음을 통탄하면서 이에 대한대책마련을 위해 능록의 뒷산에 모여 회의를 소집 하였다. 회의석상에서 마을의 촌주 한사람이 지난밤 꿈에 신선을 만나 내일 있을 회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신선은 내일 정오에 중랑천가에 푸른사슴 한 마리가 내려와 목욕을 할 것이니 제물을 준비해 두었다가 사슴에게 바치고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정숙한 처녀 한사람을 사슴에게 시집보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답을 해주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반대하는 의논도 있었으나 이왕 폐허가 된 마을을 살리는 방법이니 한번 실행해보자는 의견으로 기울어 마침내 염씨(簾氏) 집의 15세 난 딸을 사슴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며칠 후 신선이 시킨대로 산 정상에 제물을 준비하여 사슴이 내려오기를 기다리자 과연 사슴 한 마리가산에서 내려와 중랑천에서 목욕을 하였다. 마을 회의에서 결정한대로 염씨 처녀를 곱게 단장시켜 제물 옆에 다소곳하게 앉혀 두었는데 목욕을 끝낸 사슴이 등을 돌리며 처녀더러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처녀는 사슴이 시킨대로 등에 올라탔는데 처녀를 태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아본 사슴이 766번지 쯤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지금의 하천이 생긴 방향으로 사라졌다. 마을사람들은 사슴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자멀리서 물줄기 두 개가 나무가지 모양으로 흐르기 시작하더니 중간쯤에서 합쳐서 한줄기로 되면서 황토흙으로 뒤덮였던 마을 앞 전답이 기름진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이 신기한 일에 놀라워하자 그중 한사람이 "이건 사슴과 결혼한 염씨 처녀의 눈물이니 냇물 이름을 녹천이라 하자"고 제의하였다. 모든 주민이 만장일치로 그 뜻을 따르기로 하면서 마을이름도 녹촌이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녹촌 혹은 녹천이라고 마을이름을 녹천시내와 혼용하였다. 녹천(鹿川)은 염씨 처녀가 이곳에서 사슴과 결혼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날 이후부터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지만 이상하게도 녹천의 남쪽에 있는 능골과 그 아래 마을들은 여성들의 기(氣)가 세어져 음란한 부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곳 사람들은 사람을사슴에게 시집보낸 해괴한 일을 한 녹천사람들이 자기 마을에 재앙을 내린 것이라 하여 녹천과 왕래조차하지 않고 등을 지고 살게 되었다.

능록에 정간(貞簡) 이명(李蓂)의 무덤을 만들 때 지나가던 승려가 이곳은 헌화형(獻花形) 이어서 "자손은 번창하지만 음란하니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지기(志氣)를 다스려야 하는 곳으로 될 땅"이라 하였다. 헌화형은 양다리를 벌려서 중간 구덩이를 연 것과 같은 풍수리지설에 의한 지세인데 여인이 다리를 벌린 형태이므로 음란하다 하여 주택지나 음택(陰宅)으로 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곳이다. 마을사람들은 동네 재앙을 막을 수 있는 비법에 대해 물었는데 승려는 녹촌과 혼인을 금하고 등을 지는 형태로 집을 짓고 마을의 동쪽에 절을 세우면 동네 화근이 사라진다 하였다 절의 이름을 마음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각심사(覺心寺)라고 붙이라 했는데 녹천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고 자신의 마을에 액운이 깃들어 그러니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는데 이때부터 능골과 그 아랫마을 사람들의 집은 녹천을 등지고 지었으며 각심사에서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하였다. 승려의 말대로 수백년이 지나서 헌화형의 중심이 되는 곳에는 신창중고등학교,염광여중고, 월계동고등학교,인덕공업전문대학이 들어서 땅의 억센 기운이 뻗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한편 녹촌에는 조선 세종의 6대손이 되는 사람의 별당이 있었는데 그를 녹촌대감이라 하였다. 주변은 모두 그의 사지(賜地)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소작인 노릇도 하였다. 월계동 513~534번지 일대는 연촌(硯村) 혹은 벼루말이라 한다. 높이 120m의 엄정산 아래에 위치한 이 마을은 132번지 일대에 연못이 있어서 전체적인 모양이 벼루같아 보인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안골이라고도 부르는이 일대는 동쪽의 하계동을 붓골(佛骨), 동남쪽의 묵동을 먹골이라 하여 문방사우 가운데 셋이 모여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일대에서 문재(文才)가 나올 것이라는 예견을 했는데 1937년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하계동에 세워지자 이 예언이 맞았다고 믿었다.

월계동 760~780번지 일대를 능골 혹은 능리(陵理),능안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산 55번지에 이명의 신도비가 있고 750번지에 그의 무덤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인데 이조참판,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를 지냈던 조선시대의 청백리인 이명의 무덤이 워낙 커서 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이나 대군, 임금의 경우만 신도비를 세웠기 때문에 신도비를 세울 정도면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에서 능이라 불렀는데 그의 무덤 주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했다. 능골은 녹천과 함께 월계동을 이루는 중심부락인데 각심부락과는 서로 이웃해 있다. 두 마을 모두 산제(山祭)를 지내고 있다. 이명(1496~1572)은 명종 때 나서 중종 때 죽었는데 윤원형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청렴 결백하여 청백리로 선정되었는데 그의 신도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강암의 좌대석 위에 대리석으로 세워진 그의 신도비는 뚜껑돌 없이 윗부분이 둥근 반월형으로 되어 있다. 1937년 경충선이 개설되면서 85번지에 성북역이 만들어졌는데 처음 이름은 연촌역이었다. 1963년 3월 5일 성북역으로 개칭된 이 역은 경원선과 경춘선 교외선 및 수도권 전동차가 정차하는데 당초에는 장위역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가 월계역으로 바뀌었다. 일본어로는 월계를 월경(月經)과 같은 겟게이」라고 읽으므로 발음관계상 옛지명의 하나인 연촌으로 바뀌었다. 1938년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성북역은 사실상 동북부 방향의 서울로 진입하는 관문이 되어 이를 중심으로 많은 시장이 서게 되었고 이 때문에 성북역주변은 강원도 지방에서 수송되어 온 시멘트와 무연탄의 보관창고가 들어서게 되었다. 우이천을 건너 이웃한 장위동 주민들의 전답이었던 월계동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도 경원선과 경춘선이 놓여지면서 였는데 버려지다시피한 중랑천 서쪽 호안을 서울시에서 택지정리하여 아파트단지를 건립하면서 일대의 면모를 달리하게 되었다.

중랑천

중랑천은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신북리 북쪽 계곡에서부터 시작되어 남쪽으로 흐르면서 의정부시의 광쟁이 개울과 백석천(白石川)을 합치고 서원천(書院川)을 합한 물줄기는 다시 도봉구에 와서 한내[漢川]와 당현천(堂峴川) 등 18개의 지류를 갖고 있는 중랑천은 성수동과 금호동의 경계에서 한강으로 흘러들어 가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45.3km나 되는 하천으로서 서울의 그 어느 하천보다도 길다. 현재 중랑천(中浪川)이라 부르고 있는 명칭 외에 시대와 지역적 특성에 따라 송계천, 중량포(中梁浦, 中良浦), 충량포(忠良浦)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먼저 송계천(松溪川)이라는 명칭은 냇물 동쪽에 송계원(松溪院)이 있는데서 연유되었음을 왕조의 기록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종실록의「조선 태종 9년 5월에 태조의 제사를 올리기 위해 건원릉에 나가려 홍인문 밖에 이르렀을 때 앞선 신하가 살피고 돌아와 "송계원 서쪽천의 물이 넘쳐 건널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는 것과,「세종 2년 4월에 상왕(태종)이 철원 등지로 행차하려는 도중 송계원평에서 말을 멈추었다」라는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이로써 송계라는 중랑천의 옛 이름은 그 역사적 유래가 조선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한편 중량천이나 충량포라는 이름들은 하천의 형세가 넓은 물가를 이루고 있는 특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들로 보여진다. 이들 모두는 일정한 표기를 갖고 있진 않으나 왕조실록과 동국여지비고, 대동지지 등의 기록에서 표기만 다를뿐 음이 비슷한 명칭으로 나타나고 그 위치도 동일한 지점이어서 송계나 속계, 중량포나 충량포는 다같이 중랑천을 일컬었던 명칭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묘자리를 건원릉이라 칭하고 후손들도 장차 그곳을 장지로 삼으라 일렀다. 이에 5대 문종의 현릉에서 18대 현종의 경릉에 이르기까지 9개의 능을 이룬 게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이 되었다. 이 동구릉을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효종은 중랑천 부근의 넓은 모래사장에 자주 행차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것은 병자호란 후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시절에,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8년간이나 볼모로 잡혀 있었던 그 굴욕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군을 정비하면서 북벌군의 군사훈련을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연이 서려있는 울분을 풀기위한 곳으로도 이용되었던 중랑천에 얽힌 뒷얘기는 이외에도 많다. 동구릉이나 사릉, 광릉 등이 있어 역대 왕들의 능행이 잦았는데 이를 위해 특별히 석교를 놓았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재건 시 송계교의 석재를 헐어 사용하는 바람에 고종 이후엔 능행길이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강원도 방면으로 나가는데 있어 교통연결에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중랑교는 1934년에 가설된 것이지만 다리가 놓여 진 것은 조선 초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중랑천을 둘러싼 풍취가 세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온다.

 

夏龍同徵麥穗場(하룡동징맥수장) 여름 밭두둑에 바람 잔잔하니 밀 이삭이 널려있고

秋郊雨足稻花香(추교우족도화향) 가을 들판에 비가 흡족하니 벼꽃이 향기롭네.

一遊正合三豊望(일유정합삼풍망) 오늘의 한번 노는 일 농군들도 기뻐하는 것이

準擬豊登十月場(준의풍등십월장) 시월의 타작마당은 풍년이 틀림없겠네.

 

이는 당시 세종과 상왕이 송계 언덕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고 중량포에서 점심을 들며 마련한 술자리에서 병조참의 윤회(尹淮)가 지은 것으로 상왕이 흡족케 했다는 7언절구시이다. 이런 기록이나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중량천(中梁川)의 표기로 보아 옛날 우리 중랑천변은 대단히 넓은 들판으로 한가롭고 풍광 좋은 농경지대였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건원릉에 모신 태조의 능 참배를 위해 태종이 수시로 행차하였는데 후대의 왕들도 자주 능행을 하면서 지금의 월릉교 밑에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계교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고 이에 따라 자주 보수를 하게 되었다. 송계교를 목교에서 석교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은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부역자 중중이(仲伊)라는 사람은 눈이 먼데다가 열여섯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였다. 국가의 명이라 부역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고 양주 관아에서 이미 수차례나 인원 점검을 해왔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그의 딸은 자신이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며 양주 관아를 찾았으나, 처녀의 몸으로 돌 나르는 일을 할 수 없다하여 관아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중이의 딸은 관아 앞에서 여러 날을 지새며 아버지 대신 부역시켜 줄 것을 간청하자, 관아로부터 드디어 부역 허가가 떨어졌는데 반드시 남장을 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지만 문제는 생리현상이었다. 동료들과 일하다가도 배변 시는 앉아서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뇨 시에는 남자들과 달리 앉아서 해야 하므로 금방 여자임이 탄로 날 지경이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를 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양주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시킴으로써 중이를 대신해서 부역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녀를 중랑(仲狼)이라고 불렀고, 중랑(中浪)의 어원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우이천(牛耳川)

우이천은 중랑천의 제1지류로서 상류의 덕성여대 앞에서 대동천,

쌍한교 지점에서 가오천, 우이제3교에서 화계천 등의 지류와 각각 만나

지하철 6호선의 석계역을 지나 월릉교와 석관동 두산아파트 사이를 관통하여

중랑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으로서 중랑천 지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도봉구 우이동 200번지 북한교에서부터 중랑천 합류지점까지 흐르는 이 하천의

현황은 유로연장은 8,330m, 하천의 폭은 평균 60m, 유로면적 49만 9,800㎡,

유역면적 27.43㎢의 물줄기다.

1983년 12월 하천정비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지속적인 정비가 계속되었으며,

1992년 12월 8.33㎞에 해당하는 범위의 하천대장이 작성되어 있다.

우이천의 지명인 우이(牛耳)는 이 하천의 상류에 있는 도봉산 한 봉우리가

소의 귀와 같은 형태로 자리잡고 있고, 북한산과 도봉산이 이어지는 소귀고개(牛耳嶺)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의 동명인 우이동도 같은 이유에서 붙혀진 이름이다.

따라서 우이천을 다른 이름으로 ‘소귀내’라고도 불렀다.

하천 위에 가설되어 있는 큰 다리로는 쌍문동에 있는 쌍문교·쌍한교·수유교,

번동과 창동 사이에 있는 우이1교·번창교·우이제2교·우이제3교·신창교,

월계로에 있는 월계2교, 광운초등학교와 광운중학교를 연결하는 월계교,

장위동에서 광운대학으로 건너가는 장월교,

지하철 석계역 부근의 하천 복개지 아래 부분에 있는 기우천교 등이 놓여 있어

지역간의 이동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있다.

이 하천의 상류지역 훼미리랜드 입구에 하천을 복개하고 주차장을 만들어 놓아

우이동길과 방학로를 따라 이곳까지 차량 진입이 용이하며 이곳부터는 걸어서

산에 올라야 한다. 하천을 따라 위로 곧게 올라가면 우이동 유원지를 거쳐

우이령에 다다르고 다시 우측으로 가면 도봉산 만장봉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그린파크 관광호텔을 지나 올라가면

 도선사를 거쳐 북한산으로 올라갈 수 있어 등산로로서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또한 하천의 상류에 문화유적도 풍부하여 도선사·봉황각·손병희선생 묘 등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까지 퍼온글이었답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