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유래
경주 최씨의 유래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사로(斯盧)의 6촌(村) 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사량부)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遠祖)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여 누대로 살아온 경주(慶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명문거족(名門巨足)의 문호(門戶)를 열었다.
857년(신라 헌안왕1) 신라의 사량부(沙粱部)에서 출생했던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0년안에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 때 혼자 당(唐)나라에 건너가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금방(金榜:장원)하여 선주 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治績)을 쌓아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받았다.
879년(헌강왕5) 당나라 반적인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관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참전했던 고운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다만 천하의 사람이 다 죽이기를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죽이기를 의논했노라...] 반적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혼비백산하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으리만큼 가슴을 꿰뚫는 세찬 힘을 지닌 글로서 천하를감탄시킨 명문으로 알려졌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중산복궤집]과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名著)를 저술했으며, 884년(헌강왕10)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僖宗)의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태산(太山:태인), 함양(咸陽), 부성(富城:서산) 등지의 태수로 나갔다.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의 횡행으로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 894년(진성여왕 8년)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嘯風弄月)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2)에 95세로 선화(仙化)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孤雲)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신라인)으로서 당나라 명사(名士)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고운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와 친교가 두터웠던 고운(顧雲)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시(詩)가 고운이 당나라에서 명성을 떨쳤던 활약상을 뒷받침해 준다.
[내가 들으니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가 있어 그들은 머리에 높은 산을 이고 있고, 산 위에는 황금의 궁궐, 산 아래에는 한없는 바다로되 그 중 푸른 계림이 있어 거기 특이한 인물이 태어나니 그는 3세에 바다를 건너 문장으로 중원을 감동케한 이로서, 18세에 문단에서 마음껏 겨루며 단 한번의 화살로 금문책(金門策:과거)을 맞추었노라]
이 한편의 시를 통해서 중원을 주름잡던 고운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그가 남긴 심오한 문장은 깊은 함축 속에 많은 뜻을 간직하여 우리 한문학의 조종(朝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조선전기의 문장가로 알려졌던 서거정(徐居正)은 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계원필경을 봄에, 아직도 알지 못할 이 있으니당시의 기풍이 이처럼 놀라웠음은 아직도 이땅의 문장이 일찍이 예와 같이 않음이로다]라고 했으며, 성종(成宗) 때의 대문호였던 성현(成俔)은 그의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우리나라 문장은 최치원으로부터 비롯된다(我國文章始發於崔致遠)]고 쓰고 있다.
또 효종(孝宗)과 숙종대(肅宗代)의 학자 홍만종(洪萬宗)은 그의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최치원의 시는 격률이 엄격하고...표현에 뜻이 깊은 함축이 있어 직접적 표현 대신 끊이지 않는 여운이 있다]라고 평했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豫示)를 왕건(王建)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 건국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조선 때 와선 인조(仁祖) 명종(明宗) 선조(宣祖) 임금이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참조 -명종 1545(병오)-1567(정묘) - 선조 1568(무진)-1608(무신) - 인조 1623(계해)-1649(기축) - 정종 1399(기묘)-1400(경진)--
한편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太祖:왕건)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老:시조 고운의 손자, 원보 은함의 아들)는 나이 겨우 12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分)을 하사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元鳳省)의 학사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후 승로의 나이 17세 때 고려 태조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惠宗)을 비롯하여 정종(定宗), 광종(光宗), 경종(景宗)을 거쳐 6대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 이후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積弊),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군제(軍制)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偶像)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개국공신 후손의 등용 등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간추린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7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급제했던 관가정(觀稼亭) 청(淸)은 자운(子雲)의 아들로 고려말에 겸교정승을 지냈으며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辛旽)의 전횡을 탄핵하기 위하여 상소(上疏)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신주감무관(信州監務官)으로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공민왕23)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禑王)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양주풍양(楊洲豊壤)의 송산(松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으며, 이태조(李太祖)가 좌찬성(左贊成)을 제수하고 수차례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끝까지 이를 거절하자 태조는 그의 절의를 높이 기려 송산(松山)을 어래산(御來山)으로 봉하고 그가 살던 모옥(茅屋)에는 관가정(觀稼亭)이란 제호(題號)를 내렸다.
은거생활 속에서도 목은 이색, 행촌 이암, 양호당 우현보, 야은 길재 등과 도의로 교우하며 [채미가(採薇歌)]로 울분을 달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오다가 1414년(태종14) 9월 28일 향년 71세로 임종을 맞이하여 자손들에게 [내 비석에는 반드시고려의 관직을 쓰라]고 유언했는데 개갈(改喝)시에 잘못하여 조선 소함(召啣)인 좌찬성이라고 비에 새겼더니 갑자기 천둥이일고 벼락이 떨어져 비석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후손 몽량(夢亮)은 병마정도사를 역임한 인(隣)의 증손이고 확(確)의 아들로1617년(광해군9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의주판관(義州判官)이 되어 1627년(인조5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독전(督戰)중 적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끝내 굴하지 않다가 살해 되었다.
문창후의 9세손으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를 역임했던 화숙공(和淑公) 현우(玄祐)는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치적으로 명망이 두터웠고,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가문을 더욱 빛냈다.
화숙공 현우의 6세손 형손(亨孫)은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내고 적개공신(摘慨功臣)에 올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홍(漢洪)은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올랐다. 종질 호(湖)는 무과에 장원하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올라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했고, 정유재란 때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균(元均) 등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청난2등공신(淸難二等功臣)으로 계성군에 추봉되어 가문에 공신(功臣)의 맥(脈)을 이었다.
화숙공 현우의 8세손으로 성종 때 문과에 급제했던 숙생(淑生)은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사간(大司諫)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고 인조(仁祖) 때의 명장 진립(震立)은 경주최씨의 [쌍의(雙義)]로 가문에 절맥(節脈)을 이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제안(齊顔)의 증손이며 고려 말의 문신(文臣)으로 성품이 강직했던 계림군 탁(倬)은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충렬공(忠烈公) 광위(光位:제안의 현손)는 고려명종(明宗) 때 왜적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워 초명(初名)인 광훈(光勳)에서 광위(光位)로 사명(賜名)받았고, 벽상삼한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이르러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정랑공(正郞公) 호(灝)는 고려 정종 때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을 받아 [전후한서(前後漢書)]와 [예기정의(禮記正義)],[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의 명저를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사성공(司成公) 예(汭)는 이조정랑(吏曹正郞)과 성균관의 사성(司成)을 지내고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충간(忠諫)으로 유명했던 문밀공(文密公) 제(堤:밀직공 선지의 5세손,문숙공 선의 아우)는 충선왕(忠宣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9살에 시를 지었던 문정공(文正公) 해(瀣)는 원(元)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지내고 귀국한 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세속에 아부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아 벼슬에 있는 동안 기복이 많았으나 조금도 지절을 굽히지 않았고 [동인명현문(東人名賢文)]과 [졸고천백(拙藁千百)]을 저술하여 당대의 문호로 명망을 떨쳤다.
1594년(선조27) 무과에 급제했던 진립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우 계종(繼宗)과 더불어 의병(義兵)을 일으켰고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를 인솔하여 서생포(西生浦)에서 적을 대파했으나 병자호란 때 늙었다는 이유로 근왕(勤王)하는 장수를 바꾸려하자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종하는 후미부대를 지휘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이 포위당하자 이 노장(老將)은 용인 험천(龍仁險川)에서 순절했는데, 꼿꼿하게 서서 움직이지 않고 활을 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고 하며, 화살이 다 되자 따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너희들은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 없다. 나는 여기서 한 치도 떠나지 않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이 자리를 표시하여 두라]하고는 끝까지 항전했다. 난이 평정된 후에 여러 아들이 그곳에서 그의 시체를 찾았는데, 화살을 온 몸에 맞아 고슴도치와 같았으나 얼굴은 살아있는 것 같이 자약했다고 한다.
한쪽 눈에 반안경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일생을 기인(奇人)으로 살았던 호생관(毫生館) 북(北)은 특히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 불리웠으며, 팔도를 주유(周遊)하다가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서 [천하의 명사가 천하에서죽는 것이 마땅하다]하며 투신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그외 정조(正祖) 때 효행과 학문이 뛰어나 [칠계선생(漆溪先生)]으로 일컬어졌던 흥원(興源)과 시집(詩集)을 남겼던 소(昭)를 비롯한 그의 손자 성효(性孝)가 뛰어났으며,
동학교조 수운(水雲) 제우(濟愚)는 경주 귀미산(龜尾山) 용담(龍潭)에서 득도하여 동학(東學)을 창설했고, 토대로 하여 이 세상은 공맹(孔孟)의 덕(德)으로는 부족언(不足言)이라 하고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을 제병장생(濟病長生)을 주장하여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지상천국의 현실적인 이상을 표현했으며, 종수(宗秀)의 아들 시형(時亨)은동학의 제 2대 교주로서 이름났었다.
한말(韓末)에 경향(京鄕)의 선비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었던 대원군(大院君)의 정책을 탄핵하고 일생을 대절(大節)로 살다간 면암(勉庵) 익현(益鉉)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운동을 지도했고 항일구국 항쟁의최선봉에 나섰던 한말 최대의 거유(巨儒)였다. 1855년(철종6) 문과에 급제했던 면암은 고종(高宗) 때 장령(掌令)을 거쳐 호조 및 공조판서(戶曹,工曹判書)와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을 지내고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팔도사민(八道士民)에게 포고문을 보내어 우리민족이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왜적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는 오직 궐기와 투쟁만이 있을 뿐이라고 하여 전국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국가 패망의 때를 당하여 여러 동지와 더불어 죽기를 결심하고 의기를 높이 들어서 싸우고자 한다]는 거의소(擧義疏)를 채택했다.
[백발이 휘날리어 밭이랑에 드날림은/초야의 충심을 바치려 함이로다. /난적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할 일/고금이 다를소냐 물어 무엇하리오] 당시에 면암이 지은 시로서 구절마다 애국 충성의 염이 가득하여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일제는 끝내 굽힐 줄 모르는 면암의 충절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마도(對馬島) 위립영(衛立營)으로 귀양보내어 단발을 강요했으나 그는 단식으로 대항하며 제자 임병찬(林炳贊)에게 유소(遺疏)를 구수(口授)하였는데, 왕으로 하여금 오직 영구히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을 예언했고 자기는 한숟가락의 쌀과 한 모금의 물이 모두 적의 공급에 의한 것이므로 단식을 결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나이 74세이니 죽는 것이 조금도 애석하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죽게 되어 눈을 감지 못하겠다는 내용이 [면암집(勉庵集)]에 전한다.
1906년(광무10) 10월 수비대장으로부터 면암에 대한 식비가 한국 정부의 부담이라는 말을 듣고 계속하던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단식으로 병을 얻어 그해 2월 5일에 대마도 병영에서 서거하니 그의 한 많은 일생과 신념으로 일관되었던 생애가 종결되었다. 면암의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그의 자질문인(子姪門人)은 물론 상무사원(商務社員)을 비롯한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부두에 나와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日月高忠)]이란 조기를 높이 들고 통곡하였다.
그밖의 인물로는 일본의 과중한 과세에 항거했던 봉환(鳳煥)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우리나라한글 발전에 공헌했던 외솔 현배(鉉培), 독립운동가인 창식(昌植) 등이 학문과 충절(忠節)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경주최씨를 더욱 빛냈다
경주최씨의 여러파의 파조
1) 관가정공파(파조:淸) 청 11세) 광정공파(파조:鄲) 단 12세) 게림군파(파조:倬) 탁 8세) 길성군파(파조:有井) 유정 10세) 동성공파(파조:宗瑜) 종유 7세) 문밀공파(파조:提) 제 9세) 문순공파(파조:문순공 渙 환 6세) 문정공파(파조:瀣) 해 12세) 밀직공파(파조:光祐 광우 9세) 사성공파(파조:汭) 예 12세) 상서공파(파조:淵) 연 11세) 송오공파(파조:漢) 한 12세) 시중공파(파조:尙勳 상훈 6세) 영흥공파(파조:영흥백에 봉한 之美) 지미 8세) 좌윤공파(파조:海雲)해운 10세) 정랑공파(파조:灝) 호 12세) 진사공파(파조;宗祗) 종지 4세) 청성군파(파조:淸城侯 周) 청성후 주 5세) 충렬공파(파조:光位)광위 9세) 판서공파(파조:江)강 11세) 판서공파(파조:士元)사원 8세).판서공파(파조:賢進)현진 12세) 화숙공공파(파조 玄祐 현우 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