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유래
성씨의 유래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대 씨족사회에는 성이라는 것이 아직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우리나라에서 중국식 한자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이후의 일이다.
1.고구려고구려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으나, 대개 장수왕 때(413∼491)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高氏)의 성을 썼다.그밖에 고구려에서는 해(解)· 을(乙)· 예(禮)· 송(松)· 목(穆)· 우(于)· 주(周)· 마(馬)· 손(孫)· 창(倉)· 동(董)· 예(芮)· 연(淵)· 명림(明臨)· 을지 (乙支) 등 10여종 성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백제근초고왕 때(346∼374)부터 여씨(餘氏)라 하였다가 무왕 때(600∼640)부터 부여씨라 하였다.그밖에 사(沙)· 연(燕)· 협()· 해(解)· 진(眞)· 국(國)· 목 (木)· 백()의 8대성과 왕(王)· 장(張)· 사마(司馬)· 수미(首彌)· 고이(古爾)· 흑치(黑齒) 등 10여종의 성이 사용되었다.
3.신라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金)이라는 성을 사용하였다. 신라의 종성인 김씨·박씨는 7세기 초부터 《구당서》· 《신당서》에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신라)임금은 김진평이며, 국인에는 김·박 양성이 많고, 이성끼리는 서로 혼인하지 않는다.”라든지, “왕의 성은 김씨,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백성은 씨는 없고 이름만 있다.”라고 하였다.한편, 6성(이·최·정·손·배·설)의 대두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손·배씨는 통일신라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각각 나타난다. 그밖에 장(張)·요(姚) 등의 성도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삼국의 성씨 가운데 고구려와 백제계의 성씨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고, 신라에서 출자한 성씨가 9주5소경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삼국통일 후 나당간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국의 동성불혼(同姓不婚)의 관념이 점차 수용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사정은 전혀 그러한 제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왕실부터 철저한 근친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신라는 당의 책명(冊命)을 받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성불혼의 예에 따라 동성의 왕대비 또는 왕비의 성을 왕의 성과 다른 글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성씨관계 기록이 국내의 실제사실을 반영한 국내자료와 당나라의 책봉을 받기 위하여 보낸 외교문서와는 차이가 생겨났다.
즉, 국내의 실제사정은 왕과 왕모 또는 왕비가 다같이 김씨였지만, 당나라의 책봉을 위하여 보낸 문서에는 그 김씨가 왕모 또는 왕비의 부명(父名)을 따서 숙씨(叔氏)·신씨(申氏)·정씨(貞氏)와 같은 성자를 사용했던 것이다.
4.고려시대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인 호족은 사성· 모성· 자칭성 등의 수단을 통하여 성씨를 취득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의 군현 조직체계와 후삼국시대 호족의 군현 지배기구를 이어받은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 사업을 완수한 다음 전국 군현의 개편작업과 함께 전국 군현별로 각기 토성을 분정(分定)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성씨체계가 비로소 확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성씨가 귀족·관료에서 점차 양민층으로 확대되어갔으며, 천민층의 양민화에 따라 성씨를 새로 취득한 계층이 후대에 올수록 늘어갔다.
한성화 그 자체가 중국 성씨제도의 모방인 이상 고려왕조의 전국적 성씨 분정책도 중국의 성족분정, 씨족지· 성씨록의 편찬·반포 및 ‘천하군망표(天下郡望表)’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15세기 초를 기준하여 우리의 성씨가 총망라된 《세종실록》 지리지 소재 성자를 당대(唐代)의 ‘군망표’ 소재 성자와 대비해 보면, 전자는 대부분 중국의 유명성자를 모방한 것이며, 후자에 없는 것은 박씨 등 16성(朴· 沈· 河· 玉· 明· 俊· 昔· 諸· 益· 森· 邦· 芳· 價· 勝· 濯· 承氏)에 불과하다.
물론, 우리의 성씨가 모두 중국의 것만을 모방하였다고는 볼 수는 없다. 박·석·김씨와 같은 신라의 종성은 본디 신라에서 출자한 것이며, 후삼국시대 이래 호족들의 한성화(漢姓化) 과정에서 스스로 성씨를 호칭해 놓고 보니 우연히 중국의 성자와 동일한 것도 많았던 것이다.
5.조선시대고려초에 확립된 성씨체계는 15세기 초까지 끊임없이 분관·분파 등 성의 분화와 발전이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성씨체계도 다시 정비되었다.
성씨가 보급된 뒤에도 무성층으로 남아 있던 공사노비·화척(禾尺), 향·소·부곡민, 역·진민 등 천민층은 10세기 이래 조선시대까지 개별적인 신분해방과 신분상승으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성씨를 획득해 갔지만, 그들에게 성씨가 획기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15, 16세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 가운데 대략 절반을 차지하였으니 무성층이 그만큼 많았다. 그렇게 많았던 천민층이 16세기말부터 시대적·사회적 변동에 따라 신분해방과 함께 새로 성을 가지게 된 계층이 격증해 갔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성씨(姓氏)에 관한 옛 문헌(文獻)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들 수 있다. 이 문헌의 기록에는 우리나라 성씨의 총수가 무려 496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 문헌이 편찬된 당시에도 이렇게 많은 성씨가 실재하였으리라고는 보기가 어렵고 고문헌상에 나오는 기록을 총망라한 성시의 기록으로 추산하여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말기 영조(英祖)때의 이의현(李宜顯)은 그이 저서 도곡장설(陶谷叢設)에서 우리나라의 성씨를 298성으로 수록하면서 이를 저성 희성 벽성 복성으로 분류하고 있다.
우리나라 성씨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통계는 1930년 10월 1일 실시한 국세조사의 상황이다. 이 조사는 국세조사의 부대조사써 실시한 것으로 우리나라의 실시를 본관별로 세대주의 성을 조사한 것으로써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250성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는 왕족인 전주 이씨를 포함한 이성(李姓)이 항상 대성의 필두를 차지했으나 1930년 국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김성(金姓)이 월등하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로 1930년 10월 1일 국세조사에 따른 부대조사로 조사한 성씨와 분포상황에 따른 우리나라 10대 성을 살펴보면
김씨(金氏) 858,239, 이성(李姓)이 577,271, 박성(朴姓)이 304, 248, 최성(崔姓)이 190,237, 정성(鄭姓)이 147,475, 강성(姜姓)이 81,841, 장성(張姓)이 80,272, 한성(韓姓)이 77,224, 윤성(尹姓)이 74,292의 순으로 10대 성이 우리나라 총 가구수의 64.8%의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3만가구 이상의 성시로는 오씨(吳姓), 임씨(林姓), 신씨(申姓), 안씨(安姓), 송씨(宋姓), 서씨(徐姓), 황씨(黃姓), 홍씨(洪姓), 전씨(全姓), 권씨(權姓), 유씨(柳姓), 고씨(高姓), 문씨(文姓), 백씨(白姓), 양씨(梁姓), 손씨(孫姓)의 순으로 16성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우리나라 육대성을 이·김·최·안·정·박(李·金·崔·安·鄭·朴)의 순이라 하였으나 많이 변화한 것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