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길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아침 탕춘대 능선을 걷다.

최병규 2009. 8. 31. 11:58

불광역에서 아침 7시30분에 만나기로 했던 박성근 부장은 시간전에 나와 있다. 내가 10분 늦고 박주순 시인은 결국 나타나지 않아 둘이서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탕춘대 능선으로 향한다. 쪽두리봉을 우회해서 향로봉과 불광사와 탕춘대 갈림길에서 탕춘대 방향으로 향한다.비가와서 그런지 등산객들이 거의 없다. 나이 드신분들 몇 팀만 보이신다. 우리는 탕춘대 안내소(구 매표소)를 잘 나잇는 길을 따라 성곽을 걷는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홍제동으로 갈 수 있는 독바위 암문을 지나 상명대 쪽으로 가서 상명대로 하산 하지 않고 직진하다 성곽 오른쪽 밖으로 나간다.인적이 드문곳이라 수풀이 길을 막는다. 걷다보니 누군가 벤치를 소나무 아래 갖다 놓은 것이 아닌가..누가 갖다 놓았지 꽤 무거워 보이는 벤치인데.. 둘이 앉아 얘기를 하며 홍은동을 내려다 보면 너무나 좋을 거라 생각하며 발길을 재촉한다.얼마쯤 내려오다 비가 그치는 것 같아 자리를 깔고 박부장이 가지고 온 오가피주를 한잔한다. 산모기가 피부에 달라 붙는다. 따갑다..하  탕춘대에서 바라보면 주위 경관(남쪽으로 백악산,인왕산 서북쪽으로 놓여 있는 쪽두리봉 향로봉 승가봉 문수봉 보현봉 형제봉이 둘레를 이루며 훤히 보이는 비경이다)이  너무나 좋아 연산군이 이 경치에 도취되어 자주찾은 곳이라 한다. 탕춘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연산군이 와서 경관 좋은 둔대에서 흥청망청 놀아서 탕춘대라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가 숨쉬고 있는 비장한 지형이었다 한다. 검색하다 홍지문과 탕춤대에 관한 자료가 있어서 아래에 옮긴다.

 

탕춘대는 1976년 11월 11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예로부터 널리 알려진 정자로 이것을 중심으로 한 일대(부암동·홍지동·신영동 ·평창동)를 통틀어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인다.

일찍이 연산군이 수각(水閣)과 탕춘대(蕩春臺) 등을 짓고 놀았다고도 하는데, 숙종 때에 북한산성·탕춘대성을 쌓고 부근을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 삼으면서 주둔 군인들의 위락장소로 변하였으며, 시인·묵객 등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거사 동지인 이귀·김류 등이 광해군 폐위 문제를 의논하고 칼을 씻은 자리라고 해서 ‘세검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북악산(北岳山)·남장대(南將臺)·비봉(碑峯) 등에 둘러싸이고 사천(沙川)이 계곡을 흐르는 풍치지구(風致地區)이다.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후 간장 담그는 기술자와 창호지 만드는 기술자를 상주케 하여 ‘메주가마골’이라는 별칭도 생겨났으며 장판지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 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한말에는 이곳에 신식 군영(軍營)을 설치하였고, 또한 광목을 바래던 표백서(漂白署)도 있었다. 8·15광복 전부터 앵두 ·능금 ·자두 등의 산지였으나 근년에는 택지가 조성되어 많은 주택이 들어섰고 평창동∼정릉(貞陵)을 연결하는 북악터널이 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아래 사진들은 운무에 뿌옇게 카메라에 담긴다.)

 

 

 

 

 

 박성근 부장 비를 피해 처마밑에서

 계속 도로를 따라가면 구기터널 오늘은 왼쪽으로 용화1공원지킴터로 오른다 

 

 

 

 

 쪽두리봉이다

 왼쪽 인왕산과 오른쪽 안산이 보인다

 쪽두리봉

 향로봉

 좌로 백악산과 우로 인왕산 넘어로 남산이 보인다

 

 탕춘대 능선에서 본 쪽두리봉

 

 탕춘대 공원 지킴터